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내전 (문단 편집) === 국민파의 상황 === 공화파의 혼란한 상황만 본다면 상대적으로 일치단결된 국민군을 운 좋게 지휘한 행운아 프랑코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지만 국민파 역시 내부 단결이 그리 잘 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되려 국민파를 형성하는 [[왕당파]], [[보르본 왕조|카를리스타]], [[자본가]], [[팔랑헤]], [[공화주의]][* 케이포 데 야노나 미겔 카바네야스, 에밀리오 몰라는 공화주의 성향을 보인 주요 인물이었다.] 우파는 모두가 이념적으로 상반되는 위치에 있어서 공화파보다 일찍 내분이 터질 뻔했으나 프랑코의 수완에 의해 다 찍어눌린 것이다. 물론 프랑코의 경쟁자 대부분이 비행기 사고로 죽어버리는 등 운도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구체적으로 팔랑헤당은 [[에른스트 룀]]과 [[아돌프 히틀러]]가 서로 대립했던 것처럼[* 갈색 셔츠를 제복으로 한 돌격대(SA)의 대장이었던 에른스트 룀의 경우 히틀러의 오랜 동지였지만 히틀러가 손을 잡고자 했던 독일의 귀족층 즉 융커층과 연합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이어 프로이센 귀족의 전통이 강한 국방군을 뒤집고 SA를 독일의 정규 군사조직으로 만들려고 꾀하였다. 당연히 히틀러, 괴벨스,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등 나치당 주요 인사들은 권력을 용인해주었던 힌덴부르크를 비롯한 프로이센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에 따라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에른스트 륌과 주요 갈색 셔츠대 수뇌부 그리고 중앙당의 반나치 인사들을 숙청했다.] 이념적으로 부유층을 적대하는 파[* 팔랑헤는 조직 문화가 의외로 좌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제복이 파란 셔츠에 [[로마식 경례]] 말고 인민전선식 경례도 했다. 그 외에도 소싯적에 CNT와 연대하려고 했던 경력도 있어서 특히 팔랑헤 좌파는 주변 세력들로부터 반쯤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특히 초기 파시즘은 무솔리니 개인의 경력 뿐만이 아니라 사상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회주의의 파생 그 자체다.][* 의외로 파시스트들이 경제적 관념에 있어서는 그들의 정적인 사회주의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상 경제관에 한해서는 파시스트의 이념적 비조라 할 수 있는 조르주 소렐의 영향력이 크다. 이 조르주 소렐은 평생동안 극좌와 극우를 오가다가 죽을 때는 레닌주의자로 죽었다. 그 사상적 경향으로 인해 조르주 소렐을 극좌로 볼지, 극우로 볼지는 오늘날에도 주된 떡밥이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그 정적인 이탈리아 공산당은 제각기 자기네 이념의 태조로 모시다시피 했다. 사망 당시에 조르주 소렐의 묘소에 극좌와 극우가 나란히 헌화하기도 한다고. 그리고 팔랑헤는 이탈리아, 프랑스 파시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조르주 소렐의 조합주의적 개념은 오늘날에도 사회적 경제의 이념적 기원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 파가 병존했고 또한 가톨릭 색채가 짙고 지방자치를 선호했던 카를리스타[* 정작 카를리스타도 그 태생이 19세기의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에 기원하는데 이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봉건적 지주와 가톨릭 종교계 외에도 자유주의적인 경제체제 하에서 소외감을 느껴 온 지방의 자작농, 소상공업자,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카를리스타 반란 당시 반란의 주 참여자들 중에는 자신들을 보호해 주던 길드가 망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상공업자들도 있었다.]와 반목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당파도 부르봉 직계를 지지하는 만큼 부르봉 방계를 지지하는 카를리스타와 공존이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국민파의 지도부도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이 사람은 제2공화국 개국공신이기도 했다. 국민진영이 노선 정리가 안 된 초반에 세비야를 먹었을 때는 여전히 공화파식 삼색기와 국가가 유지되었던 것도 이 영향이 있다. 케이포는 제2공화국 대통령이었던 [[https://ko.wikipedia.org/wiki/니세토_알칼라사모라|니세토 알칼라사모라]]와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후안 야구에[* 국민진영 유력 군인이면서 호세 프리모 데 리베라와 친했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라몬 프랑코[* 프랑코 동생인데 공군 조종사에 국회의원도 역임한 당대 명사였다.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에는 미국 파견 무관으로 있었는데 정치성향은 좌파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형을 따라 국민진영에 가담했다.], 미겔 카바네야스[* 레룩스 계열 급진당원이었고 그 아들은 정적인 PSOE에서 국회의원이었다가 망명했다. 명색이 바지사장이라도 한때나마 사장이었지만 자기 아들을 구할 힘은 없었다.]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헌정체제 자체는 공화정을 선호했던 반면 카를리스타와 알폰소 13세파 왕당파들은 왕정 복귀를 원하는 등 내부적 반목의 씨앗은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프랑코가 국민파의 내부적 반목 요인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굳힐 수 있었던 건 개인적 정치적 수완도 있었지만 운이 굉장히 컸다. 팔랑헤의 경우 개전과 동시에 감옥에 있었던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변호사 출신의 팔랑헤 창시자로 알폰소 13세 때 군사 독재를 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장남이다. 쿠데타 소식이 터지자마자 공화파 정부에게 체포당해 알리칸테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프랑코가 포로 교환이나 석방을 위한 자금 마련, 심지어 호세 안토니오의 국제적 석방 여론 조성마저 차단하여 1936년 11월 처형당했다. 프랑코가 이 양반을 싫어했던 이유는 전통적 우파 권위주의 성향 프랑코에게 순수 혁명적 성향의 데 리베라는 과격한 혁명 사상으로 인해 영 거슬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견으로는 오히려 공화국이 포로 교환을 거절했고 프랑코가 호세 안토니오를 구하려 그가 수감되어 있는 알리칸테 교도소를 공격하였다는 주장도 있다.]가 공화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고 기존의 자본가 정당인 CEDA의 당수이자 자본가 세력 자체를 대표했던 힐로블레스는 내전 발발 이전 정치 투쟁에서 이미 지도력이 큰 타격을 입은 후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 이 양반은 자신이 집권했던 1933~36년 사이 선거로 당선된 우파 정권 시절에는 때 맞추어 부흥한 국제 파시즘의 기세를 타 본인도 우익 독재 비스무리하게 밀어붙이려고 했으나 애초에 뒷심이나 전투적인 결단력 같은 건 부족했던 사람이라 자기 지지층이 처음에는 팔랑헤, 그 다음에는 프랑코에게 홀랑 넘어간 이후 망명지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되려 같이 망명 중인 공화파 인사들과 함께 반 프랑코 모의를 꾸미는 등 노골적으로 기회주의적인 면을 보였다. 그러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정계 복귀를 노렸지만 끝내 실패하고 늙어 죽었다.] 퇴위한 알폰소 13세를 포함한 직계 왕족들과 카를로스파 왕위 사칭자였던 하비에르[* 그런데 이쪽은 부르봉파르마계, 다시 말하면 원래는 이탈리아 출신이라서 망명이라고 하기도 거시기하다. 카를로스파 직계는 원래 따로 있었지만 80살 넘게 살아 골골대던 최후의 직계 왕족이 내전 발발 직후에 죽고서 갑론을박을 거친 끝에 방계로 계승하게 되었다.]는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군부에 의해 귀국이 차단되었고[* 정작 알폰소 13세는 무솔리니를 설득해 국민파를 지원하게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프랑코는 독재자가 되고 나서 알폰소 13세의 시민권과 재산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후안 3세]]가 국민진영에 가담하기 위해 프랑스 국경을 넘어 오자 내부 교통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왕위 계승자가 설치는 꼴을 봐주기 싫있던 몰라는 후안 3세를 프랑스로 도로 추방해버렸고 국민파가 고분고분한 보르본 왕조의 충신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후안 3세는 반 국민파로 전향하여 처음에는 히틀러, 그 다음에는 연합국에게 반프랑코 로비를 하면서 프랑코 타도 운동을 벌이게 되며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스페인 왕위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물론 아들이 스페인을 민주화시키기 시작하자 아들을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하며 계승권을 포기했다.] 범 보수 왕당파의 정치적 당수이며 우익 내에서 굉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호세 칼보 소텔로 의원은 내전 발발 직전 좌익 테러로 인해 암살당했다. 군부 내에서는 원래 국민파의 지도자였던 호세 산후르호[* 이 사람은 대단한 친독일 인사였다. 이 사람이 국민파의 지도자 자리를 유지했다면 스페인이 독일과 연합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일찍 찾아온 전쟁" 편은 이 사람이 죽지 않고 [[뮌헨 협정]]에서 [[네빌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해서 2차 대전이 일찍 벌어진 시대를 그리고 있다. 실제로 스페인이 독일 편을 들었더라면 프랑스 침공이 좀 더 수월하게 풀리기야 했겠지만 어차피 프랑스 침공은 대성공이었으니 큰 의미가 없고 그 외에는 스페인이 단합이 잘 되었다면 모를까 스페인은 이 내전 이후로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내부 단결에 힘을 쏟았기에 스페인 자체의 메롱한 국력과 단합이 전혀 안 되는 내부상황을 생각할 때 큰 변수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루마니아나 헝가리 같은 C급 동맹국이 하나 추가되는 정도... 굳이 도움되는 정도 생각해 보면 영국의 지브롤터를 차단시켜 영국의 지중해 세력을 약화시켰을 수 있겠지만 B급 동맹국 이탈리아가 그리 결정적인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만큼 영국과 소련을 밀어버리는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안봐도 비디오.]는 내전 발발 3일만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고[* 추락 이유가 골 때리는 게 자기 군복을 너무 많이 실은 나머지(...) 비행기 무게 조정에 실패하는 바람에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프랑코의 경쟁자들인 마누엘 고데드는 바르셀로나 쿠데타가 실패하자 공화파 민병대에게 체포된 후 총살, 장군인 주제에 엄청난 뻘짓을 벌여 전쟁 수행 능력이 엉망이라고 낙인찍힌 지 오래였던 에밀리오 몰라 또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전쟁 끝날 때까지 동네 왕초 노릇하며 프랑코의 눈에 자주 거슬렸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카우디요]][* 직역하면 'The Leader'라는 의미. [[무아마르 카다피]]가 자기 자신을 [[대령]]이라 칭한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의 권좌를 위협할 그릇은 못 되었고 결국 전쟁 후 실권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이 외에 프랑코의 소싯적 상관인 호세 미얀아스트라이[* [[리프 전쟁]] 당시 [[스페인 외인부대]] 창설자다. 당시 프랑코가 이 사람 직속 부하였다. 한때 압둘 알 카림의 리프 공화국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한쪽 팔과 눈을 잃은 것과 후술할 내전 당시 스페인의 대철학자 미겔 우나무노와 논쟁을 벌인 사건으로 유명하다.]나 형 니콜라스 프랑코, 동서인 라몬 세라노 수녜르[* 친독파 정치인으로 프랑코 정권의 정부 구성 등에 기여했고 청색사단 창설 같은 일에도 관여했다. 군인 일색이었던 초기의 프랑코 정권 하 몇 안 되는 민간인으로 극초기에는 그냥 군정에 불과했던 프랑코 정권이 외부세계에 그나마 정상국가 같아 보이는 모습으로 보이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본인이 사상적으로 동경했던 추축국들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대전 후 프랑코 정권 내 권력구조 재편 과정에서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프랑코와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2차대전 이후 한편으론 --겁도없이-- 옆나라 [[프랑스 제4공화국]]의 [[알제리 전쟁]]에서 [[샤를 드골]] 상대로 쿠데타를 획책한 OAS의 [[라울 살랑]]을 지원하는 한편 반대론 또 패망 후 망명을 떠난 구 공화파 지식인, 정치인들 중 사상적으로 그나마 중도에 가까운 자유주의자들을 다시 받아들여 내각에 초청하자고 프랑코에게 건의했다가 까이는 등 상당히 종잡기 힘든 행보를 보이다 결국 뒷방 늙은이 신세로 밀려났다. 심지어 프랑코 사후에는 프랑코 정권과 본인이 참여했던 쿠데타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며 본인들이 저지른 쿠데타는 명분 없는 반란이었음을 쿨하게 인정하는 회고록을 써내기까지 했다. 이러한 수녜르의 행보에 관해선 스페인 내에서도 '말년에 생긴 진실성 있는 변화였다' vs '단순한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옛 공신의 기회주의적 행보와 개인적 원한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평가가 갈리는데 어쨋든 그의 회고록은 권력 투쟁의 당사자로서 당연할 수밖에 없는 주관성을 감안하더라도 프랑코 정권 핵심 내부자의 시선으로 정권을 묘사한 책으로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같은 이들의 도움도 컸다. 왠지 굉장히 절묘한 타이밍에 비행기들이 많이 추락한 것 같긴 한데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군사기술 발달사의 관점에선 저런 우익 진영의 수장들이 직접 몸으로 숭고한 시범을 보이며 대규모 병력의 항공 수송이란 분야에서 초기 발판을 닦은 역사적 경험이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당연하게 프랑코가 수작질 부린 거란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당시 항공 수송 기술 자체가 이만큼 초기적이고 불안정했던 만큼 타이밍과 대상이 굉장히 미묘하긴 해도 새로 발견되는 증거가 없는 한 딱히 근거는 없는 소리다. 때문에 당시 거의 독점적인 여객 수단은 열차였고 비행기는 이런 내전 상황만큼 정말 어지간히 시급하고 기밀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에나 활용되었다.[* 사실 시급한 상황이라고 해서 꼭 비행기가 활용되었던 것도 아니다. 독일의 분탕이 본격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소련이 공동전선 구축을 모의할 때 영불의 사절은 느긋하게 기차로 오고가서 소련의 개탄을 받았다.(...)] 사실 국민파 지도자들이 대규모 군사적 공중수송이란 새로운 군사 기술 분야의 의도하지 않은 선구자(...)가 된 것도 정부 몰래 최대한 빨리, 은밀하게, 식민지에서 본토로 병력 수송을 해야 했던 쿠데타 상황이란 특수성 때문에 내린 불가피한 결정에 가까웠다. 힐로블레스, 케이포 데 야노[* 느닷없이 세비야를 먹은 공로는 인정받았지만 전직 공화국 개국공신에 튀기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주정뱅이여서 평판이 안 좋았다.] 등의 인물들은 능력이나 카리스마 면에서 애초에 프랑코의 상대가 안 되었고, 각종 왕당파의 수장인 왕족들이야 외국에 망명해 있었지만 우익 군부의 수장이었던 호세 산후르호, 스페인의 자생적 파시스트 팔랑헤의 지도자였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범보수파의 정치적 수뇌였던 칼보 소텔로 등은 짬이나 연륜이나 카리스마나 능력이나 프랑코에 의해 하등 밀릴 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이렇게 정적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국민파 내부 균열 또한 대패질이 되자 프랑코는 팔랑헤식 국민생디칼리슴적 파시즘도 아니고, 왕당파나 카를리스타식의 봉건적 신정 정치도 아닌 자신만의 권위주의 독재를 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데 리베라의 후계자 마누엘 에디야 등이 팔랑헤의 혁명성을 회복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자 마누엘 에디야도 숙청해 버렸다. 하지만 팔랑헤는 배신당했다고 보기에 애매한 게 호세 안토니오 사후 팔랑헤당 후계자가 된 마누엘 에디야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같은 팔랑헤당 당원들까지 공격하고[* 심지어 대포까지 동원했다.] 프랑코에게 위협을 가하자 프랑코가 숙청한 것이고[* 다만 아예 처형당한 [[에른스트 룀]]과는 달리 마누엘 에디야는 4년 복역 끝에 석방되고 1970년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우익들을 통합할 때도 팔랑헤당[* 통합 팔랑헤에서 구 팔랑헤 출신자들의 비율은 54%였다.] 중심으로 통합한데다 [[프랑코 정권]] 안정화 이후에도 한동안은 완전히 국민생디칼리슴적 파시즘 성향을 버리지는 않았다. 44년부터 연합군이 이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연합군에게 잘 보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해외 정치적 망명자들이나 국내 정치범 수감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감형을 하거나 형기가 얼마 안 남은 이들에 대해서 사면조치를 내렸다. 축구선수 중에서도 공화파에 연루되어 망명했다가 이런 사면조치로 인해 귀국해서 정상적으로 리그에서 활동한 사람도 꽤 있다. 좀 시간이 지난 후지만 심지어 공화국의 명장인 [[비센테 로호]]도 어떤 의미로 사면받았고 심지어 정권 말인 1960년대 후반에는 극우 신문사인 [[알카사르]]에서도 비센테 로호가 죽었을 때 부고기사를 내면서 왕년의 적장의 군사적 공로를 인정하기도 할 지경이었다.] 경제도 번영하고 외국물도 먹게되면서 슬슬 파시스트 물이 빠지게 되었다. 왕당파의 경우 프랑코의 후계자는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되었기 때문에 왕당파는 배신당하지는 않았다고 보지만[* 물론 이마저도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알폰소계 왕당파에 따르면 정당성 있는 국왕은 [[알폰소 13세]]의 아들인 [[후안 3세]]였다. 그렇지만 국민파가 [[후안 3세]]를 비토했기 때문에 후안 3세는 1945년 이후에는 국내의 알바 공 같은 거물 왕당파나 제2공화국 망명정부와도 손잡고 대놓고 반프랑코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는 카를리스타에게도 어필하는 메시지도 보냈다.] 반대로 왕당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배격한 채 [[프랑스 혁명]] 이전 신정적 봉건 자치사회로의 회귀라는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비전이 있었던 카를리스타[* 카를리스타는 의외로 이미지처럼 단순한 수구꼴통 집단은 아니었다. 19세기부터 나름대로 대중운동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조의 영향을 받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하비에르 공의 아들인 카를로스 우고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딸 정도로 공부했고 스페인 말도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외국물을 오래 먹었다. 그 친척인 여공작은 자치적 사회주의 모델을 접목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카를리스타를 좌경화시켰다. 특히 당시 카를리스타가 왕으로 모셨던 하비에르가 나이도 들고 자동차 사고를 겪어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그 역할을 카를로스 우고가 대행하다시피 했다. 이 덕분에 카를리스타는 60년대 프랑코 정권 하에서 물론 종교의 자유 부여에 격하게 반대했지만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반프랑코 민주화 운동에도 관여했다. 물론 이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라 카를리스타 기준으로는 하비에르 사후 카를로스 우고가 정당한 스페인 왕이 되었어야 했지만 카를리스타 일각에서는 "빨갱이 왕이라니 말도 안 돼!" 라면서 반발했다.]는 배신당한 게 맞다. 공화파와 국민파의 내부적 단결에서 핵심적인 차이는 그냥 프랑코가 군부와 아프리카 군단 내에 독자적인 세력기반이 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정치적 라이벌들을 상대로 간을 보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협상할 줄도 알고 경우에 따라선 통수질을 치는 센스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케이포는 내전이 끝나고 정치적으로는 숙청하면서도 내전기 영웅으로서 영예는 누리게 해 줬고 위에서 말한 후안 3세나 돈 하비에르와 같은 왕족들은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완전히 제압은 못하고 정치활동에 방해를 가함과 동시에 한 편에서는 나름 내줄 건 내주는 식으로 협상도 했다. 그 밖에 카를로스파들의 경우 그나마 순종적인 인물들은 주로 법무대신나 국회의장, 어용 야당 포지션격으로 의원 관직을 뿌리면서 팔 콘데 반항적인 인사들은 가택연금하거나 그냥 자기네 본거지엔 나바라에 몰아 버렸다. 이념적 영향력이나 규모가 훨씬 커서 프랑코도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운 구 팔랑헤 출신 오래된 셔츠들을 대할 때도 다른 건 몰라도 군부가 쥐고 있던 핵심적인 권력은 주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 부각이 덜 돼서 그렇지 내전기 동안이나 프랑코 정권 초기나, 후기에나, 프랑코 사후에나 [[https://es.wikipedia.org/wiki/Atentado_de_Begoña|이런]] [[https://es.wikipedia.org/wiki/Sucesos_de_Montejurra|저런]] 우파 진영 내부 폭력 사태도 꽤 있었다.[* 프랑코가 물론 스페인 역사에서 유례 없는 권력을 행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에는 미국이나 자유주의 물을 먹은 바티칸 등 외국의 영향을 갈수록 심하게 받게 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내전기처럼 정적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프랑코의 정적들 중에는 외국에도 아는 친구들이 많은 거물급 왕족, 귀족, 가톨릭 사제들도 많았던 점도 있었다. 특히 사제들은 그 무시무시한 내전기 시기에조차도 탄압을 덜 받았다. 후안 3세나 하비에르나 반프랑코 행보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죽이기는 어려워서 프랑코는 '쟤들은 외국인'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하비에르가 국내의 대리인으로 썼던 마누엘 팔 콘데 같은 이도 물론 프랑코 정권하에서 수차례 옥살이나 가택연금을 겪었다.] 사실 우파도 내전이란 비상 응급상태에 일시적으로 뭉쳤던 게 하나의 정권으로 변하긴 했지만 그 시작은 팔랑헤, 카를리스타, 알폰소파 왕당파, 부르주아 민간 정치인, 군부, 헌병군 전부 다 반공주의, 가톨릭을 제외하면 구심점이 딱히 없고, 독자적인 기반과 내부 풀이 있는 소집단들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건 좌파 공화진영하고 큰 구조적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코의 외국 후원 세력들도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뭐 사실상 후원 세력인 영국과 독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바티칸도 사실 독일하고는 척지는 사이였다.[*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반유대주의 때문에 기독교 교리를 마개조했고 그에 거부하는 가톨릭 사제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독일이 침공한 나라들 중에는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프랑스 같은 가톨릭 국가도 많았다. 물론 바티칸은 [[교권 파시즘]] 성향을 가진 이탈리아와는 친했다.] 그 영향을 받아 카를리스타는 당시 스페인에서 청색사단에 대해 참여를 거부했다.[* 카를리스타가 반나치 움직임을 취한 것은 그들의 왕인 하비에르 공과도 관련이 있다. 하비에르 공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양차대전에서 벨기에군에 장교계급으로 복무했다. 2차대전의 경우가 더 복잡한데 이때는 벨기에가 망하면서 [[독일 국방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일단은 풀려났다. 이후 하비에르 공은 유산으로 받은 성을 제공하는 등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국방군]]에 잡혀 죽을 뻔한 걸 [[필리프 페탱]]과의 연줄 덕분에 목숨만 건져 [[다하우|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되어 체중이 36kg까지 빠질 정도로 고생했다가 간신히 해방되면서 풀려났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오직 '프랑코 개인'에게만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프랑코에게 힘을 실어 주기도 했으며 가톨릭 교회 역시 도움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국민진영의 각 정파 중 반공 외에 통일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주제 중 하나가 친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이념적 통일성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여기에 더해서 사실 가톨릭 교회는 명분, 도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국민진영이 그나마 해외에 명분적인 면에서 어필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요소이기도 했다. 본질적인 폭력성이나 학살의 빈도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가톨릭 교회 사제들은 애초에 구체적인 직업적 네트워크로 연계가 탄탄한 직종인 만큼 내전 초기만 하더라도 이들을 통한 전 세계 가톨릭계를 향한 언론전으로 특히 가톨릭 노동자 계층이 막 중요한 유권자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영미권 나라들의 외교적 영향력을 통해 공화파를 고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